STORY
지난 이맘때의 약속에게
흰 파도가 눈꽃처럼 흩날리던 바닷가.
한켠 버려진 낡은 컨테이너.
이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곳을, 우리의 아지트로 정했습니다.
매미소리가 쏟아지는 계절.
소금기가 쌓인 창가.
파도소리가 공기를 밀어내고, 만연한 여름이 교실로 스며듭니다.
기말고사가 끝난지는 벌써 일주일, 예정보다 늦어진 학사일정에 우리는 아직 방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드러지는 벚꽃아래 입학한 것이 엊그제인데.. 벌써 3학년의 반이 지나가버린 기분입니다.
중학교의 일상은 어떤가요? 기대한 대로인가요? 여전히 보던 얼굴들이라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듯,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것이겠죠.
자리에서 내려다 본 운동장은 꽤나 분주합니다. 학생 여럿이서 들고가는 구조물, 조금씩 덧대어지는 장식들.
매년 이맘때쯤이면 봐오던 풍경입니다. 곧 있을 마을 축제 관광객에게 학교를 개방하는 시기니까요.
조금 다른 점은, 항상 밖에서만 구경하던 것이 이번엔 우리의 일로 다가왔다는 것 이지만요.
학교 부스는 뭘 준비해야할까, 교실 정리는 어느세월에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야외를 바라보면 문득 마을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게 느껴집니다.
어쩐지 걱정입니다-.
시험도 끝났고, 꽤나 모여놀기 좋은 곳이 학교였지만.. 당분간 발을 들이기엔 사람이 너무나 많을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어슴푸레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어릴적 한창 비밀기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우리가 찾아낸 장소.
그땐 열심히 꾸미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관리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가면 먼지를 청소해야 할 수도 있어요, 벌레도 나올 것 같고.
문틈새로 넘어온 하얀 소금기가 가득 쌓여있겠죠. 상상만으로 약간 귀찮아질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묘하게 끌리는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래, 잠시 그곳에서 지내기로 할까요.
이참에 새 물건들도 놓고, 정리도 좀 해서 가끔의 도피처로 사용하는거에요.
가끔 힘이 들거나, 밖을 다니기 여의치 않을때, 모두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모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 * *
2014. 07. 26.
2014년 7월 25일 저녁, 한 소도시가 모두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상당히 큰 피해를 남긴 화재사건은 전 일본에 아오하마의 이름을 단 채 이례없는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건발생지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이어지는 축제기간동안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며, 마을 주민은 물론 관광객을 포함한 인명피해 또한 뼈아픈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화재 원인은 현재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자연발화의 확률은 극히 낮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생존자들을 위한 임시거처의 확보가 진행되고 있으나 인근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공공시설물 역시 대부분 전소하여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길 마을 자체의 즉각적인 회복은 불가하며, 이전의 경제적-문화적 사이클을 완전히 회복하고 구축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재발방지 및 안전 확인을 위해 외부인의 마을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잠정 폐쇄될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후략)
* * *
사건이 발생하고 오래도록 새하얀 모래사장은 먹을 물들인 듯 회빛을 띄었고, 인근 바다는 검은 거품을 뿜었습니다.
녹음이 우거졌던 산은 앙상한 가지와 함께 메마른 땅을 씻겨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날의 붉은 하늘을 기억하는 우리가 스스로를 보듬기까지 역시 그랬습니다.
..작별을 건네지 못한 채 보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기만 하는것도 버거울 만큼 우리의 일상은 불규칙적으로 돌아갔고,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삶에서 지워내려 노력했나요? 기억하기위해 애를 썼나요?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냐며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을겁니다.
빛의 앞에 선 우리의 뒤엔 당연하리만치 그림자가 질 수 밖에 없는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가히 축복받은 일이겠지요. 주위의 모두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손끝의 울림에 정신이 듭니다. 둔탁하게 울리는 진동음, 발신자 불명의 전화.
언젠가 걸려온 전화기의 스피커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낮설었습니다.
- "... ..안녕하세요, XXX의 전화가 맞나요?"
* * *
온몸을 찌르는듯한 감각, 녹아내리다 못해 비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몸에 불이 옮겨붙은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워 앓는 소리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터져나오는 숨을 토해내며 급히 상체를 세우고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리면 눈부신 태양빛에 미간을 찌푸립니다.
연약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 희미한 매미의 울음소리, 그립고 다정한 일상의 끝자락이 느껴집니다.
눈을 뜨면 그곳은 텅 빈 폐허입니다. 내려앉은 건물들 사이로 약간은 시린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검게 그을린 땅 위로 연녹빛의 싹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듯이요.
복사뼈를 적시는 바닷물이 익숙합니다. 바닷가인가? 우리는 바닷가로 도망쳐 나온걸까요?
몇몇의 그리운 얼굴이 보이고,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정되지 않는 가슴에 시야가 울렁거립니다. 금방이라도 주위에 타오르던 화염이 다시 우리를 삼켜버릴 것만 같습니다. 속을 게워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를 즈음, 눈앞에 보이는 것은.
... 우리의 작은 안식처.